짬짬이 남는 시간을 책을 읽다보니 올해는 책을 평소보다 많이 봤다. 반대로 영화 보는 횟수는 팍 줄어부렀고 재밌게 본 영화도 기억남는 게 없다. 비용 대비 재미를 생각하면 역시 독서가 최고의 취미인 듯하다.(도서관에서 빌리면 0원...) 아직 읽지 않은 많은 고전과 쏟아져 나오는 흥미로운 신간들을 생각하면 평생 지루할 틈도 없겠쥬...
최근에는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머리 식힐 겸 읽을 수 있는 범죄 시리즈물을 시작했다. 스웨덴 수사국을 배경으로 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그것. 총 10권 중 우리나라에는 8권이 번역돼 나와있다. 1권 로재나부터 4권 웃는 경관까지 읽었다. 익숙한 탐정물과 달리 현실적인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새로웠다. 범죄자의 트릭을 파해치는 번뜩이는 추리는 없지만 증거를 하나 하나 수집해가며 경찰 동료들과의 협력을 통해 범인을 뒤쫓는 현실적인 수사가 있다. SVU같은 잘 만든 미드 수사물을 보는 느낌도 난다. 당시 스웨덴 사회 분위기도 잘 느껴진다. 스톡홀롬을 골목 골목을 같이 걷는 기분. 경찰에 대한 자조적인 묘사가 인상적이어서 메모해두었다.
1. 장관들 중 절대다수가 경찰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함마르가 오렌지 껍질 벌레에 대하 아는 것 정도. 한마디로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더라 하는 것뿐. 2. 경찰은 직업이 아니다. 사명도 절대 아니다. 저주일뿐. 3. 경찰은 필요악.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 4. 경찰이란 직업 자체는 최고로 지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 직종에는 그런 자질을 보유한 사람을 끌어들일 매력요소가 전혀 없음.
10권까지 완역이 되면 나머지 6권을 몰아서 읽을까 한다. 4권까지 읽으며 느꼈던 하나의 불만은 각 이야기마다 ‘색정광’으로 불리는 여자 캐릭터가 큰 역할이든 지나가는 역할이든 꼭 등장하는 점인데(도대체 왜...) 또 그런 캐릭터가 등장할지 궁금하다. 제발 안 나왔으면.
SF소설도 종종 읽었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예상과 달리 너무 찐한 퀴어소설이라 놀랐다.(나에게 너는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부족한 편지야, 그리고 네가 고르는 말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 라니 와우... 나는 너에게 하나의 맥락이 되고 싶어. 나도 나한테 그런 존재가 돼 주면 좋겠어, 라니 와우222) 주인공들이 시간선을 오가며 서로에게 편지를 남기는 방식이 독특하고 엄청나다. 바다표범의 가죽 무늬,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 나무의 나이테, 찻잔의 찻잎이 그들의 의사소통이 된다. 상상력 미쳤다. 새뮤얼 딜레이니의 <노바>는 굉장히 신화적이어서 메인 줄거리에는 흥미가 안 생겼다. 우주 패권을 둘러싼 가문의 대결, 일리리온을 차지하기 위한 주인공의 광기 어린 집착이 공감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신화보듯 운명이겠니 이해하며 봐야한다. 그러나 노동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이 흥미로웠고, 책이 1960년대의 출간된 것을 감안했을 때 우주 여행에 대한 아이디어도 재밌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유치해서 취향이 아닌데, 하면서도 감동의 눈물을 또르르 흘리게 되는 그런 맛이었다... 로키 사랑해...ㅠㅠ <죽은 등산가들의 호텔>은 처음으로 읽어본 러시아SF소설이었다. 긍정적인 의미로 도라이 같고 종잡을 수 없는 느낌.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지금은 그렉 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를 읽고 있다. 올해 읽은 SF소설 중 가장 심장을 뛰게 한다... 존잼... 테드창은 너무 사고실험서를 읽는 느낌이라 약간 취향에서 빗겨가부렸고 앞으로는 이해가 되든 말든 그렉 이건을 열심히 읽어보아야 겠다.
민음사 유투브를 종종 보며 직원들이 소개한 책 중 궁금한 것들은 메모해두고 따로 읽게 되었다. 그렇게 영업 당해 읽은 책들이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 에도가와 란포의 <인간 의자>,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 넬라 라슨의 <패싱>,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 등이 있다. 그리고 책 제목은 익숙하지만 전혀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던 이탈로 칼비노도 읽게 되었다. 나 빼고 이탈로 칼비노를 다 알고 작품을 읽어본 것 같은 느낌에 진 것 같은 기분이들어 ‘선조 3부작’ 당장 시작... 짧고 우화적이어서 쉽게 읽힌다. 작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삶의 양식을 느낄 수 있다.
공포 스릴러, 특히 고딕 소설도 제법 많이 읽었다. 고전 중에 고전인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시작으로(민음사 번역 너무 심했다ㅠㅠ와장창이었음) 조이스 캐럴 오츠의 <흉가>,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올해 읽은 한국 소설 중 가장 재밌었다...),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좀 독특한 스타일의 고딕 공포소설 <맥시칸 고딕>까지 쫄보 주제에 겁 이겨내고 번번이 읽어대지요? 꿈자리 사납든 말든 재밌는 읽을 거리 포기 못하지요?
같은 도서관을 가도 어느 날은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힘든 반면, 어느 날은 단 한 권도 땡기는 게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껴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서가로 간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마거릿 애트우드, 필립 로스, 이언 매큐언이 있다면 독서 권태기 이겨낼 수 있다. 이때는 구입까지 해놓고 1년 넘게 아껴두며 안 읽은 <그레이스>를 읽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진실게임에서 벗어나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층민 여성으로서 그녀가 살아온 삶의 곡절을 함께 하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서 더 귀 기울이게 된다. 문장과 표현은 말모. 다들 읽었으면...
올해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에밀 졸라가 추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인간 짐승> 앞부분을 좀 읽다가 푹 빠진 이후 <테레즈 라캥>까지 읽었다. 알고 보니 테레즈 라캥이 영화 박쥐의 원작이 되었다고. 존..잼... 내년의 어느 권태기 때 읽으려고 문학동네 판으로 <목로 주점>을 구입해 두었다.
<수영장 도서관>은 너무 퇴폐적이어서 취향이 아니었다. 포스팅 할 거 생각해서 책 읽을 때 사진을 좀 찍어둘 것을 이런 것뿐이 없넴... 메리앤이 되지 말자는 다짐으로 찍었나 봄..
구입해두고 1년 만에 읽은 책이 하나 더 있다. 9월 동안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은 그런 때가 있으니까..끄덕...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을 우리나라 주말 드라마 보듯 재미를 느끼며 보게 되는 건 그것이 인간의 보편성을 기가 막히게 다루었기 때문이겠지.
독립서점에 가면, 대형서점에 갔을 때 안 고를 것 같은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좋아하는 소설책 사고 싶은 욕구에 지고 만다. 리사르에 커피 마시러 갔다가 들른 약수의 어느 독립서점에서 서머싯 몸 소설을 한 권 샀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에릭 앰블러와 레오 페루츠에 꽂혀서 열린책들에게 감사했다. 계속 이 작가들 책들 출간을 해주셨으면... 독서가 영화나 드라마보는 것보다 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책 추천하는 게 진짜 어렵다. 그래서 잘 안 하려고 하는데, <디미트리오스의 가면>과 <심판의 날의 거장>을 읽고 이거는 무조건 ㅇㅂ이도 좋아할 거라고 확신해서 제발 읽어보라고 강권했다... 공포로의 여행, 9시에서 9시 사이, 스웨덴 기사 다 재밌다...
데버라 리비의 에세이 <살림 비용>을 읽다가 이런 쿠폰의 행운을 얻었다. 기뻐하며 사서쌤에게 교환 받아 지갑에 넣었지만 나는 연체를 안 하는 사람이라 쿠폰을 사용할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에세이 재밌어서 이 작가가 쓴 소설도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출간이 안 된 듯...ㅠ
남들이 많이 읽고 극찬하는 신간들을 따라 읽기도 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후기들처럼 빌드업 미춌다ㄷㄷㄷ하면서 읽어내려갔으나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이 한 여자를 만나 범주를 깨뜨리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는 것에 갸우뚱...? 그래요...행복하세요...하게 됨... <우리가 세상을 이해가길 멈출 때>도 후기가 너무 좋아 따라 읽었다. 실제 과학사에 상상력을 섞은 논픽션 소설인데 이과 문과 대통합을 이루었다. 모호한 진실과 문학적인 문장들 사이를 거닐었다.
빵은 맛있지만 커피는 엉망인 동네 카페에서 브릿 베넷의 <사라진 반쪽>을 읽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떠올리게 하는 작가라는 설명에 책 소개에 영업당했다. 읽어보니 오오, 정말 그런 느낌있었다. 다만 전개가 우연적이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보다 드라마틱한 느낌이 있다. 신간이 나온다면 읽어볼 의사 있을 유...
좀 더 나은 커피를 파는 동네 카페에서는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었다. 절대 로맨스소설이 아닌 성장소설이었다. 순수의 시대도 그렇고 참 현실적이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듯. 피할 도리 없는 운명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는 채리티가 안쓰럽고여...
여름과 더불어 비극적 결말로 충격을 준 소설은 메가 마줌다르의 <콜카타의 세 사람>이었다. 인도를 배경으로 기차역 테러사건이 벌어진 이후 발생하는 이야기를 등장인물 세 사람을 중심으로 다룬다.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젊은 여성과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그리고 정치적 야심으로 위증을 일삼는 체육교사가 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급박하게 전개 되는 비극. 소설의 톤을 읽지 못하고 나는 순진하게도 최악의 일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슬퍼서 오열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소설 <말라바르 언덕의 과부들>은 킬링 타임으로 읽기 좋은 재밌는 추리 소설이었다. 1920년대 인도를 배경으로 여성 변호사가 활약하는 게 이색적이고 당시 풍경을 볼 수 있는 묘사들도 흥미롭다. 머리 쓰는 치밀한 추리는 없지만 시선이 따뜻하다. 주인공인 퍼빈이 결혼해서 미친 시가에 갇혀 고통 받는 부분을 힘들게 읽을 가치가 있다. 부인은 생리한다고 격리 시키면서 남편은 바람피고 성병 걸리고 가지가지하지요?
늘 읽어봐야지, 생각만 했던 조이스 캐럴 오츠의 작품도 두 권 읽었고(<흉가>와 <멀베이니 가족>), <불복종>부터 <파워>까지 읽으며 나오미 앨더만이라는 작가도 알게 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그들의 말 혹은 침묵>과 <사건>을 읽고 난 뒤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괜히 친근하게 느껴졌고, 정한아의 <친밀한 이방인>을 읽고 난 뒤 드라마 안나가 나와서 혼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여성 작가들의 여성 서사 작품을 많이 읽은 한 해였다. ㅇㅂ쓰가 백인 중년 남성의 글을 많이 읽어 영향을 받았다고 나를 트랜스백인중년남자라고 놀리지만, 많이 교정이 되지 않았을까... 백인 중년 남성... 직업은 교수... 발기 부전이 있고 알콜 중독이며, 나이차 많이 나는 어린 여자와 불륜 관계인 그런 소설은 이제 너무 많이 읽었으니까... 보다 다양한 소설을 읽어보도록 노력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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